도로변에 주차된 Bentley 터보 R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빌리 제인.
도로변에 주차된 Bentley 터보 R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빌리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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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tley Turbo R

Billy Zane(빌리 제인)

야자수가 늘어선 캘리포니아 Pasadena(패서디나)의 거리에 빙산이 나타날 일은 없겠지만, 영화 <타이타닉>의 배우인 Billy Zane(빌리 제인)은 또 하나의 전설적인 머신, 그의 1990년식 Bentley 터보 R의 운전대를 잡을 때면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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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패서디나로

<타이타닉>의 스타
동네의 친숙한 얼굴
공동체의 예술

1997년, James Cameron(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이 스크린에서 극적으로 침몰하면서 출연 배우들은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Kate Winslet(케이트 윈슬렛), Leonardo DiCaprio(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빌리 제인은 버림받은 약혼자인 ‘Cal(칼)’ 역을 냉혹하게 연기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살인 미수와 아동 유괴마저 주저하지 않는 음흉하고 교활하며 분노에 찬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빌리 제인은 그의 가장 유명한 역할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금세 미소를 짓는 따뜻하고 매력적인 그는 비록 영화 속 턱시도 차림만큼 격식을 차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흠잡을 데 없는 스타일과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우스 패서디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빌리 제인이 깊고 영화적인 목소리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넵니다. “저만의 작은 천국 같은 곳이죠. 할리우드와 스튜디오에서 열리는 미팅이나 이벤트 등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기에 가까우면서도, 또 적당히 떨어져 있어 여유를 즐길 수 있죠.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으로 편안하게 쉴 수 있고, 이 멋진 캘리포니아 지역 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곳이에요.”

“이곳 분들은 대부분 저를 그냥 빌리라고 불러요.” 활기찬 미션 스트리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의 친구 러스 캠벨이 운영하는 빈티지 안경 전문점 Old Focals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는 경호원도, 파파라치도, 수행원도 없지만 이 배우는 자신이 타고 온 차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등장합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그의 1990년식 블랙 Bentley 터보 R은 Crewe(크루) 공장에서 막 출고되던 그날만큼이나 특별해 보입니다. 미국산 트럭과 SUV가 즐비한 이 지역 도로에서 이런 차를 보기란 흔치 않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레트로 세단을 다시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인기 TV 시리즈 <How I Met Your Mother(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배우 Jason Segel(제이슨 세걸)도 있습니다. 그는 Bentley를 가리키며 두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이 동네에서는 유명 인사를 마주치는 일은 흔하지만, 빈티지 영국 자동차를 만나는 일은 훨씬 드문 모양입니다.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2024년 영화 <Waltzing with Brando>의 주연을 비롯해 150편이 넘는 영화와 TV 작품에 출연한 빌리 제인은 자신의 연기 경력을 되돌아보는 데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이 동네에서 보내는 소소한 일상에 더 집중합니다.

 

그는 가게 안을 지나 뒤쪽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제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는 곳이에요.”라고 소개합니다.  “야외 작업실인 셈이죠. 언제든 와서 마음껏 표현하죠.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면서 제 안의 펑크록 본능을 발산하는 거예요. 무엇이든 자유롭게 쏟아내고 마음대로 실험할 수 있는 분출구죠.”

 

빌리 제인은 30년 가까이 그림을 그려 왔으며, 촬영하러 가는 곳마다 임시 작업실을 마련합니다. 그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은 역동적인 터치와 섬세한 균형을 이룬 색채 조합의 대담한 대비가 그 특징이며, 로스앤젤레스와 런던, 부다페스트, 밀라노, 마이애미에서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Old Focals 가게 벽에도 그의 작품이 늘 걸려 있습니다. 가게를 나서며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다시 한번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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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디테일을 향한 집념

소재에 대한 애정
장인 정신에 대한 찬사
아날로그를 향한 애정

빌리 제인이 Bentley에 올라 키를 돌리자 강력한 V8 엔진이 우렁차게 깨어납니다. 이내 우리는 그가 동네에서 즐겨 찾는 또 다른 곳, Davide Baroncini(다비드 바론치니)가 운영하는 독특한 의류 매장이자 패션 브랜드인 Ghiaia Cashmere로 향합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이탈리아인 다비드 바론치니가 환하게 웃으며 포옹으로 우리를 반깁니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뽀얀 스팀 연기와 강한 이탈리아 억양의 영어가 패션 쇼룸이자 카페, 박물관을 섞어 놓은 듯한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핀터레스트 속 지중해 스타일의 화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공간으로, 근사한 테일러링 의류들이 1980년대 레이싱 기념품, 세일링 의류, 베르무트 술병 사이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습니다. 뒤편 테라스에는 푸르른 허브 정원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비드와 저는 둘 다 최상의 원료야말로 품질을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믿어요.” 커피와 함께 즐길 몬테크리스토 시가릴로에 불을 붙이며 빌리가 말합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세심하게 가공하고 선별해야 하죠. 제게 Ghiaia는 이런 생각이 가장 잘 구현되는 곳이에요. 옷을 직접 만져보고 입어볼 뿐만 아니라 그 옷이 어떤 삶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도 이해하면서 옷에 생명력이 더해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인 공간이죠.”

빌리가 터보 R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장인 정신을 향한 깊은 존중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모습 그대로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차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록스테디 음악을 들으며 다음 목적지를 향하던 중 빌리가 말합니다. “Bentley의 실내 마감은 정말 훌륭해요,” “공간 구성부터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어요. 실용성과 편안함은 그야말로 최고죠. 차에 타서 드라이브를 나설 때마다 마치 특별한 날을 맞이한 듯한 기분이 들어요. 편안함은 정말이지 차원이 다르죠.”

 

“실내를 둘러보면 작은 디테일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알 수 있어요. 곳곳의 가죽, 목재, 크롬이 눈에 띄고, 모든 것이 사람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얼마나 많은 기술을 차 안에 채워 넣었는지가 아니라, 최고의 소재와 장인 정신으로 럭셔리를 말하던 시대의 차예요. 선바이저조차 가죽으로 만들어졌잖아요!”

빌리는 자신이 아날로그라면 사족을 못 쓰는 편이라고 말합니다. 빈티지 사진은 물론, 오래된 라이카와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들고 이것저것 찍어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아날로그 기기는 직접 만지고 다루는 재미가 있어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밖에 차를 세우고 Bentley의 크롬 오르간 스톱을 만지작거리던 빌리가 말합니다. “저는 그걸 ‘기계 예술’이라고 불러요. 정밀함과 본능이 만나는 독특한 지점이죠. 모든 것을 화면으로만 접하면 놓치게 되는 경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빌리가 기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의 유명한 과학 학부에서 그는 Fred Farina(프레드 파리나)와 함께 Einstein Suite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로봇 공학, AI, 생명과학, 양자 물리학 분야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을 외면하려는 건 잘못된 생각이에요,”라고 그가 덧붙입니다. 그래서 저는 방관하기보다, 과거의 소중한 교훈을 잊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기술을 영리하게 활용하고 우리 사회에 더 잘 녹여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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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이끄는 순간

Angeles Crest Highway(엔젤레스 크레스트 하이웨이)
운전자 중심
순간에 충실하게

빌리가 패서디나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연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 멀리 도시 위로 우뚝 솟아 있는 샌가브리엘 산맥과 엔젤레스 국유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간단한 점심 식사 후 우리는 수많은 헤어핀 커브와 빼어난 풍경으로 유명한 약 106 km 길이의 Angeles Crest Highway(엔젤레스 크레스트 하이웨이)로 향했습니다. 자동차 매니아들이 사랑하는 코스답게 Bentley 터보 R의 6.75리터 V8 엔진을 마음껏 몰아붙이며 놀라운 주행 성능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 유명한 고속도로의 커브를 거침없이 공략하던 빌리는 “어느 순간 문득, 이 차가 저를 찾아왔더라고요.”라고 말합니다. “Bentley가 실제 마력을 공개하지 않고 ‘출력은 충분하다’라거나 ‘충분함에 30%를 더했다’라고 말하던 시절의 차예요.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가 참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실제로 운전해 보면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이 차에서는 속도 그 자체가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단순한 가속을 넘어, 제 의지가 차에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에요.”

그럴듯한 마케팅 문구는 차치하고라도 1990년식 Bentley 터보 R의 성능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Bosch 연료 분사 시스템을 적용한 터보차저 V8 엔진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성능을 발휘합니다. 모델명에 붙은 ‘R’은 로드홀딩을 의미하며, 이름에 걸맞게 노면에 밀착하는 듯한 안정적인 주행 감각과 운전자 중심의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 차량은 Bentley의 고성능 이미지를 되살린 것으로 평가받으며, 1985년부터 1999년까지 생산되는 동안 7,000대 이상이 판매될 만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89년 터보 R이 미국에 출시되었을 때 Motor Trend 매거진은 리뷰에서 이 차를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Bentley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멀리 로스앤젤레스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차를 세우고 있자니 그 말에 반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터보 R이 출시 당시 아무리 훌륭한 차였다고 해도, 세계적인 배우 빌리 제인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36년 된 이 차를 선택한 이유까지는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빌리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빌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이 나오는 세상에서 아날로그에 닻을 내리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어요.”라고 생각에 잠기며 의자에 기대어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펼쳐진 산을 바라봅니다. “Bentley를 운전할 때면 더 이상 가상 현실에 빠진 듯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직접 느끼며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게 되죠. 친구들의 부모님은 다 새 차를 타는데 왜 아빠는 새 차를 타지 않냐고 두 딸이 물어볼 때마다 바로 이런 이유를 설명해 주려고 해요.”

 

말을 배우기도 전에 터치스크린을 쓸어 넘기는 법부터 자연스럽게 익히며 자란 세대에게 이는 어쩌면 아주 소중한 가르침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제게 행복은 결국 장인 정신과 정성 같은 단순한 것이더라고요. 오늘날 자동차가 오로지 성능만을 위해 만들어진다면, 이 차는 세월의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어졌죠. 충분한 만큼... 거기에 조금 더해서요.”